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논 바이너리 육상 선수, 여성의 신체 외형에 사회적으로 여성으로 살아온 XY염색체 복싱 선수의 여성 경기(및 시합) 출전을 두고 파리 올림픽을 관전하는 전 세계인들이 논란을 벌이는 중이다.
이들 선수들은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소위 '제3성(법조계에서 쓰는 용어로는 間性)'이라는데, 그렇다면 남성 부문과 여성 부문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남성 부문에도 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남성 부문에는 출전하지 않고 굳이 여성 부문에만 출전하기를 고집하면서 여성 선수들에게 민폐를 끼칠까?
굳이 여성 경기에만 출전하는 것은 "보다 빠르게(DITIUS) 보다 높게(AITIUS) 보다 힘차게(FORTIUS)"라는 올림픽 정신에도 반한다.
차별반대, 평등이라는 '공동체주의적 대의명분'이라는 꼼수를 써서 '보다 빠르고 높고 힘차게'를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 '보다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면 그 선수 개인의 보다 극대화된 계발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해(害)의 원칙'을 최고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자유주의 세계관에서는 논바이너리나 MTF트랜스젠더의 여성 부문 출전을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논바이너리나 MTF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온 XY염색체 선수들은 계속해서 외딴곳에서 외롭게 소외되어야 하나? 그럴 수도 없기에 딜레마다.
이런 법 제도, 정책의 공정성 문제는 정책학(정책학 중에서도 정책철학)이 전문적으로 다루는 영역인데, 이 문제를 특별히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사상이 합리적인,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정치경제 사상보다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정책 공정성의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억압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합의, 즉 자유 합의', '투명성', '지속가능성' 이 3개다. ( 그 외에도 명확성, 의사대리와 의사대의의 조화, 접근가능성, 불확실성과 숙의, 기타 등등 있지만 이 3개의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론적 차원에서 말은 고매하고 쉽지만 자유 합의, 투명성, 지속가능성을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지 '실제'를 놓고 계속 파고 들어가면 쉽지 않은 문제다.
이 공정성의 3대 조건이 실제에서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일파인 계약론적 진보적 자유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철학자 롤스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가설적 사고 체계에 따라 정의와 공정을 주창했다.
* 엄밀하게 볼 때, 신자유주의는 비계약론에 입각해서 자유주의 철학을 전개하기 때문에 롤스를 신자유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없지 않지만 롤스의 자유주의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 신자유주의이므로 '롤스의 계약론적 자유주의'를 '광의의 신자유주의'로 봐도 무방하다.
계약론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사회계약론'이다. 계약론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사상을 계약론에 입각해서 구성하고 전개한다.
롤스의 경우는 계약론적 구도를 의제할 때 사회적 이슈를 놓고 합의하는 당사자들이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 등과 관련된 특수한 사정을 모르게 한다고 가정해 놓고 계약(합의)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계약에 참여하는 자들이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지 못하기에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계약론은 공정성을 담보하는 가장 간명하고 가장 효과적인 이론 체계로 알려져 있다.
이번 사안, 제3성들의 여성 경기 참가 여부에 관한 정책을 롤스의 자유주의 '무지의 베일'에 적용시킨다면... 자기가 논바이너리인지 MTF트랜스젠더 등 제3성인지 그냥 여성인지 모른다고 가정하고, 제3성의 타고난 운동능력의 우월함과 여성의 타고난 운동능력의 부족함을 인지시킨 상태에서 제3성들의 여성 경기 참가 여부에 관한 정책을 선택하도록 하고, 서로 합의에 이르도록 한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이 공정하다고 합의할까? 제3성은 테스토스테론 덕분에 똑같은 훈련과 노력을 해도 힘과 스피드 기타 거의 대부분의 운동 역량에서 여성을 압도한다. 이게 과연 공정할까? 차별을 반대한다지만 수많은 역차별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을까?
논바이너리 니키힐츠 선수는 자신이 논바이너리인지 여성인지 모른다는 (무지의 베일) 가정을 한 상태에서, 재귀적 이기심을 가지고 정책을 선택하게 한다면 어떤 정책을 찬성할까? 아마도 제3성의 여성경기 출전을 반대할 것이다. 적극적 조치로 인해 이익을 보는 당사자가 이해관계가 갈리는 규정을 정하게 할 수는 없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상근활동가인 심기용 씨는 동성 간에도 능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면서 논바이너리와 MTF트랜스 젠더의 여성경기 출전을 찬성한다. 심기용 씨는 과연 '무지의 베일'을 써봤을까?
특수한 개별 사례를 놓고 일반에 적용되는 보편 규칙을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운동능력은 혈중 테스토스테론 농도와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규칙은 보편성을 가진다. 즉 그 규칙에 따라 모든 당사자들이 그 규칙에 구속되고 계속 반복적으로 규칙에 따른 사례가 반복되고 축적된다. 테스토스테론 혈중 농도에서 월등한 제3성들이 보다 적은 시간, 보다 적은 훈련과 노력으로 여성들을 압도하는 사례가 반복, 축적되면 과연 이런 구조는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여성들은 기꺼이 제3성들과 경쟁을 하려고 할까? 지속가능성이 없어서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런 계약론에 바탕한 이론들은 다분히 구성주의적 한계를 가진다. 실제의 개인들이 그런 가정을 할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없다. 공정, 공감을 전제로 하는 가설적 사고는 매우 고차원적인 정신능력이 필요하다. 거의 대부분은 가용성의 오류가 발생한다.
즉, 무지의 베일을 쓴다고 상정을 해도 실제로는 구체적인 개인을 놓고 보면 자기가 경험한 현실이 자신의 생각을 구속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자신을 여성이라고 놓고 사고하고 그에 따라 여성에게 유리하게 사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리 되면 제3성에게 불공정해진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이름을 썼지만 현실에서는 제3성이 아닌 '여성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계약론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운평등론 등의 이론을 가져온다. 유전자 등 타고난 운에 의한 것과 책임감 있는 선택에 의한 것을 구별해서 운에 의한 차이는 적극적인 평등 조치를 취하고 책임감 있는 선택에 의한 차이에 대해서는 적극적 평등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선택 역시 운, 타고난 능력에 좌우된다고 본다. 계속 따지고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운평등론은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운평등론은 신자유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 중 하나다.
이런 논리 실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제3성의 여성경기 참가 찬성론자들의 논리는 충분히 반박된다. 즉 신자유주의가 개인주의 관점을 양보해서 공리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관점을 받아들일 때도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에서는 제3성의 여성경기 참가는 반대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자들은 불평등의 조건과 기회 평등에 입각해서 공정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진보좌파들의 '조건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결과 평등에 입각한 적극적 평등 정책에는 반대한다. 적극적평등 정책을 허용할 때도 그 정책은 한시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적극적평등 정책에서 그 정책을 언제까지 끌고갈지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운동능력이 테스토스테론의 혈중 농도와 매우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불평등의 조건으로 주목한다. 그래서 제3성의 경우는 특정 기간 동안의 혈중 테스토스테론의 농도를 기준으로 해서 여성 경기 참여 여부를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다만 이 기준 역시 어느 정도가 돼야 공정한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테스토스테론 농도 측정 기간을 장기간으로 가져갈수록 제3성에게 불리해진다.
원래 IOC는 4년 이상의 소셜 트랜지션과 12개월 이상의 10nmol/L 이하 테스토스테론 수치 유지를 기준으로 제3성의 여성 경기 참가를 허용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았었다. 최근 IOC는 제3성의 여성부문 출전을 해당 각 종목 국제연맹의 자율로 정하도록 했고 육상경기의 경우 5nmol/L 로 기준을 더 엄격히 했다.
그런데 이는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이기 때문에 규정은 아니고 각 올림픽 대회의 조직위는 이 가이드라인에 구속되지는 않는다. 이번 파리 올림픽의 경우는 조직위가 워낙에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적 관점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런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단지 여권에 기재된 성을 기준으로 남성 여성을 판단하고 경기 허용 여부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이번 대회는 직전 대회와 동일하게 ‘여권’을 기준으로 성별과 나이를 정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여권상 ‘여성’인 칼리프는 파리 올림픽 복싱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칼리프는 생물학적 여성 선수의 코뼈를 강타하고 46초 만에 기권승을 얻어냈다.
이는 위에서 말한 대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계약론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하고 용인할 수 없다.
그리고 IOC의 가이드라인 자체도 합리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4년의 소셜 트랜지션 및 테스토스테론10nmol/L의 기준이 너무 너그럽다는 의견이 많다. 여성 선수들 평균치인 0.15nmol/L 이하여야 공정한 경쟁이 되며 또 남성호르몬 수치뿐만 아니라 여성호르몬과의 구성비까지 봐야 한다. 그게 안된다면 출전 금지가 옳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논의는 이러한 수치의 적절한 수준을 찾는 데에 집중되어야 하고 그런 과정을 찾을 때까지 경과기간 동안 제3성 선수들을 어떻게 대우할지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경과 기간 동안 제3성들은 합을 겨뤄 승패를 결정내는 '시합'에서는 출전이 어렵겠고 기록을 겨루는 '경기'에는 여성 부문에 출전 가능하도록 하되 메달은 별도로 수여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남성부문 여성부문 외에 제3성부문을 신설하는 것이 옳겠다. 물론 경기의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시합의 경우는 충분한 선수 풀이 나올지가 변수다.
평판경제신문 발행인 겸 기자. 레마코리아 대표이사. 문화정책학·과학기술정책학 박사 과정 재학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경제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통합하는 포스트자유주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평판경제신문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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