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에버랜드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가 3일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이날 푸바오를 배웅하는 환송식에는 6000여 명의 한국인들이 비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환송식 현장에 참석해 '석별의 정'을 그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해도해도 너무한다. 푸바오에 목숨을 걸었나?"며 너무 유난을 떤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들은 그간 푸바오가 언론을 통해 너무 많이 노출되어서 피곤함을 느끼는 듯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푸바오 열풍을 중국 정부의 공작으로 보고 푸바오와 푸바오 팬들을 혐오하기도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과잉반응으로서 음모론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가슴 아파할 안타까운 일들이 얼마나 많고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판다에만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며 '선택적 공감 행위'를 비판하는 지적은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같은 한국인들의 푸바오 열풍 현상의 배경은 무엇일까? 수많은 언론들이 푸바오의 일거수일투족을 경마경기 중계하듯 보도해온 것은 한-중 관계 복원을 바라는 정치외교적 함의를 가지고 푸바오 이슈를 대중들에게 노출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언론의 경마중계식 보도 행위가 너무 과도하다.
언론이 한-중 관계 복원을 위해 대중에게 노출시켰다는 것은 정치 과잉의 시각이다. 수많은 푸바오 팬들이 이별의 현장에서 흘린 눈물은 진짜 눈물이었다. 이들 중 한-중관계 개선을 바라면서 눈물 흘린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늘 그래왔듯이 언론이 조회수를 위해서 대중의 관심을 따라가거나 혹은 대중의 관심을 조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폴 블룸 (Paul Bloom) 예일대 심리학 교수는 사람의 인지적 (정신적, 감정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사람이 운용하는 자원으로서의 감정 역시 한정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연민과 공감이 과도할 때는 '선택적으로' 공감이 나타나게 된다.
폴 블룸 교수는 공감은 인간의 소중한 능력이지만 공감을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공감을 과도하게 하면 한편으로는 과도한 감정 이입 현상이 나타나서 평정심을 잃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한 것에도 공감을 하면서 옳지 못한 결과에 일조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폴 블룸 교수는 공감을 절제하고 대신에 친절과 배려를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폴 블룸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푸바오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관심, 감정 이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인지상정'을 어쩌랴?
심리학에서는 공감이 과도하게 나타나서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현상, 나아가서 공감이 필요한 경우에도 무덤덤 무감각해지는 현상을 '공감 피로'라고 부른다.
심리치료사나 의사처럼 직업상 다른 사람의 트라우마에 장기간 노출되는 사람들이 2차적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현상이 바로 공감 피로 현상이다.
연구에 따르면, 의사들의 경우 인턴을 수료하고 레지던트 과정에 들어설 때쯤이면 의사의 60% 정도가 공감 피로 현상을 겪는다고 한다.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들의 태도가 심드렁해지고 까칠해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공감 피로 현상을 막으려면 폴 블룸 교수처럼 공감을 자제하고 대신에 친절과 배려를 생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공감은 인간 본성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일반 심리학보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공감 피로를 본다. 공감 피로는 특수한 직군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일반 대중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심리 현상이라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거시적인 인간 생존 측면에서 인간의 공감의 발달을 연구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도록 진화했다는 연역적인 가설을 세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 때문에 사람들이 공감을 다른 집단으로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본다. 또 사람들의 이러한 선택적 공감, 자기중심적인 공감은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에 대한 공격성처럼 반사회적 행동을 촉진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진화심리학적 가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집단이나 세계 전체의 요구보다는 개인의 요구에 더 잘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보니 자선 단체가 기부자가 고통받는 집단이 아닌 개인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캠페인의 초점을 맞추고 기후 위기 문제를 거시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조각난 유빙 위에서 힘들어하는 북극곰에 초점을 맞추는 자선 마케팅 전략을 가져가는 것도 이러한 진화심리학적 가설에 부합하는 현상이다.
한편으로 자선 활동이나 자원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지원 요청이 계속 쇄도하고 불행한 사연들을 계속 접하면 이 같은 불행에 무감각해지며 자선 요청에 압도당하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더 이상 에너지와 시간 또는 돈을 투자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바로 공감 피로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가까이에 송파 세 모녀처럼 무관심과 외면 속에 가난과 외로움 속에 죽어가는 이웃이 있다. 멀리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으며 무고한 팔레스타인 어린이는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포탄 세례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보다 큰 불행, 보다 멀리 있는 불행, 보다 빈발하는 불행,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꼭 필요한 불행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고 푸바오에만 공감하고, 푸바오와의 석별에만 슬픔을 느끼는 행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진화심리학적으로 당연한 현상이다.
공감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폴 블룸 교수의 말은 당위일 뿐이며 많은 대중들이 그러기는 쉽지 않다. 안타까운 사정이 보이기만 하면 공감이라는 자원을 쓰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정작 공감이 필요할 때는 무덤덤해진다. 이해할 만한 부조리다.
그런데, 사람들이 푸바오에 관심을 쏟고 공감을 과잉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언론만이라도 과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마중계식 푸바오 보도는 자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언론은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쳐도 정부만이라도 보다 큰 공감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복지 사각지대에 항시 상존하는 수많은 어려운 이웃의 처지에 정부는 마땅히 공감해야 하고 저 멀리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마땅히 공감해야 한다.
엊그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가자지구에서 굶주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구호하던 요원들이 타고 있던 버스가 폭격을 맞아 구호대원들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한국 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치료받던 병원이 폭격을 맞아 무고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 한국 정부는 어디에 과잉 공감을 하고 있길래 세계 각국 정부가 공감하는 일에는 공감을 못하나?
정부가 공감 피로를 느낄 수는 없다. 보다 큰 공감을 실천해야 한다.
평판경제신문 발행인 겸 기자. 레마코리아 대표이사. 문화정책학·과학기술정책학 박사 과정 재학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경제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통합하는 포스트자유주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평판경제신문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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