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New 進)이라는 법명을 받고 '뉴진스님'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맨 윤성호가 말레이시아에서 디제잉한 EDM공연으로 말레이시아 불교계와 갈등을 빚고 있다.
말레이시아 불교계가 뉴진 윤성호를 비판하는 이유는 뉴진이 진짜 승려가 아니며 뉴진의 행위가 신성한(?) 불교를 희화화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뉴진 윤성호를 비판하는 말레이시아 국회의원 위카시옹은 지난 5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려서 윤성호의 공연을 반대했다.
2024년 5월 21일, 쿠알라룸푸르의 한 댄스 클럽에서 공유되는 한국 DJ '뉴진스님(NewJeansNim)'의 두 번째 공연이 측의 것으로 취소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니 기쁩니다. 그러나 그가 5월 31일 멜라카에서 열릴 미래인 또 다른 강연에 초청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내무부 장관에게 국가의 화합을 위해 불교 승려를 사칭하는 참가자들의 공연이 중단되어야 할 것임을 즉시 전달했습니다. 이 한국 DJ의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어떤 대가를 가져오더라도 막아야 합니다. 내무 DJ가 국내 다른 곳에서 공연을 초대하는 것을 보호해 주길 바랍니다. 만약 그가 고려 복장을 하고 공연에 불교의 신성함을 응원하는 등의 승영 요소 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불교계는 그의 입국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말레이시아 국회의원 Wee Ka Siong의 페이스북 게시물 중
불교의 교리 핵심이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연기(緣起), 무아(無我)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깨달음이다. 고에 대한 깨달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의 고통, 생로병사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 나(我)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해서 비롯되는 고통 등등 모든 고통에 대한 깨달음.
집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깨달음, 업과 번뇌 집착에서 고통이 생긴다는 깨달음
멸은 고통의 소멸에 대한 깨달음, 열반, 해탈 등등
도는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한 行에 대한 깨달음.
팔정도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방법으로서 정견 · 정사유 · 정어 · 정업 · 정명 · 정념 · 정정진 · 정정의 8가지 수행,
뉴진의 '극락도 락'이라는 무아지경의 흥겨운 외침이 깨달음을 방해하나? 수행을 방해하나? 연기와 무아를 부정하나?
"암세포도 세포"라는 말은 세포가 암세포를 죽이기 때문에 곤란하지만 "극락도 락"이라는 말은 웃고 즐기는 것도 고통을 이겨내는 한 방법이 된다는 점에서 대중이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불교 교리에 부합할 수도 있다.
반대로 세상을 등지고 엄격한 계율에 따라 용맹정진해도 불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형식이 실질을 담보할 수도 있고 담보하지 않을 수도 있다.
팔정도의 올바른 생각, 올바른 의도, 올바른 언행, 올바른 행동,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마음챙김, 올바른 집중이라는 올바른 수행에서
댄스 음악을 함께 즐기는 유흥 행위도 수행으로서 '올바른 노력'이 될 수 있을까?
'올바른 노력'일 수도 있다. 절망에 빠져 세상을 등지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당장 죽고 싶은 사람은 유흥을 하기 힘들다. 노력해야 유흥을 한다.
"부처핸썹" "극락도 락"을 외치는 과정에서 그 고통이 사라질 수도 있다.
뉴진 윤성호가 아주 큰 고통의 시절을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어제 (15일)방송된 '유퀴즈온더블럭'에 나와서 그간 있었던 일을 회고했다.
코로나 팬데믹 전후해서 개그맨들의 입지가 축소되고 윤성호도 잊힐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는데 준비했던 영상들이 해킹되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유튜브 채널 해킹당한 것이 뭐가 그리 큰 고통이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중의 인기와 관심을 먹고 사는 개그맨이 자신의 생계와 정체성이 해킹으로 위태로워지면 고통일 수도 있다.
모처럼 용기를 내어서 악착같이 살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면 정신적 충격이 크다. 그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뉴진의 깨달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물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윤성호가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데, 나쁘게 볼 필요가 있나 싶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드는데 윤성호와 함께 즐기면서 그 고통을 떨치게 됐고 삶의 활력을 찾았다면 좋은 거다.
물론 말레이시아의 엄숙주의 불교도들이 뉴진 공연하지 말라고 하면 일단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사안을 접근하는 태도, 양식의 차이이고 세계관의 차이다.
무아(無我)를 깨닫고자 하는 불교도들끼리 세계관의 차이라고 하면 뭔가 어색할 수 있지만 말레이시아 불교가 말레이시아 일반 대중 신자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데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상대가 나의 문화와 생각과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는한 상대의 문화와 생각과 가치관을 존중해 줘야 한다.
다만 말레이시아 불교계와 국회의원 위카시옹의 발언에는 뉴진 윤성호의 공연이 절대적으로 불교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아 보인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하지 말아 달라는 취지로 뉴진의 공연 자제를 요청했으면 바람직했으련만, 그러나 그것조차도 경험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그러하다고 이해해 줄 수 있다.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다르다. 한국은 자살률이 OECD 1위일 정도로 살기가 팍팍하다. 이 같은 현실에서 뉴진 윤성호의 "살아보면 살아지더라"는 고백은 고통에 빠진 많은 대중(중생?) 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형식이 정식 스님이면 어떻고 스님이 아니면 또 어떤가? 뉴진스님 이전에 원효대사가 마음이 중요하고 깨달음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주었다.
불교도로서 뉴진의 진정성이 생활 속의 불교로 나타나서 이방인도 그 진정성을 깨달을 때까지 새롭게 나아가면 평판이 관리될 것으로 보인다.
평판경제신문 발행인 겸 기자. 레마코리아 대표이사. 문화정책학·과학기술정책학 박사 과정 재학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경제사상을 연구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통합하는 포스트자유주의 이론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평판경제신문
이승훈
jake.seungh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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