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을 도입하는 방법

이승훈 승인 2024.07.08 23:40 의견 0
<레미제라블>의 진정한 주인공 자베르 경감


한국처럼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많은 나라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중대재해처벌법을 도입하는 시도를 해보려 합니다만 산업계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습니다.

되는 것을 되게 하고 안 되는 것은 시도하지 말라(레세페르)는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보면 중대재해처벌법이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먼저 중대재해처벌법이 승인되기 위한 사회적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회적 여건이라는 것은 이기심을 통한 자발적인 승인입니다.

이기심 중에도 타인에게 선한 일을 했을 때, 시간이 지나서 결국에는 재귀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 혹은 자기의 이익이 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의 이기심을 셀프 인터레스트 (self-interest)라고 합니다. 앞에 'enlightened'를 두고 수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셀프 인터레스트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의 책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을 완성한 로널드 드워킨이 쓴 책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에도 셀프 인터레스트 (self-interest)라는 용어, 개념이 나옵니다. 드워킨은 디그니티 (dignity, 인간의 존엄성)을 최상위에 두고 그 하위에 셀프 인터레스트 (self-interest)와 오센티시티 (authenticity, 진정성)를 대등하게 둡니다.

이러한 재귀성(再歸性)과 무관하게 에고센트릭한, 단순한 사적 이기심을 프라이빗 인터레스트 (private interest)라고 합니다. 프라이빗 인터레스트(private interest)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언급했던 이기심은 재귀적 이기심이 아니라 단순한 사적 이기심입니다.

영국에서 호주로 노예를 배에 실어 보낼 때 선장이 사회, 타인에 해악을 끼치며 노예가 죽건 말건 혹은 죽기를 바라면서 의약품을 빼돌리며 노예를 호송하는 경우 그 선장은 사적 이기심, 즉 프라이빗 인터레스트 ( private interest)를 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노예선이 호주로 출발할 때 태운 노예의 숫자가 아니라 호주에 도착할 때 살아남은 노예의 숫자로 보수를 책정했을 때 선장이 노예의 건강을 세심하게 돌보며 노예를 호송하는 경우 그 선장은 재귀적 이기심, 즉 셀프 인터레스트 (self-interest)를 추구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윤리에서 로널드 드워킨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상위의 가치로 놓고 있지만 필자는 실천적인 윤리 측면에 한해서 셀프 인터레스트 (self-interest)를 최상위의 가치로 놓고 있습니다. 인간의존엄성, 디그니티(dignity)는 셀프 인터레스트 (self-interest)를 추구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가치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존엄성이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농부들이 이른 봄 차가운 아침에 일어나 작물을 심고 뜨거운 여름 날 땀을 흘리며 작물을 기르는 행동이 만인을 이롭게 하고 존엄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농부의 행동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생각하면서 나온 행동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온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허구한 날 예측이 틀리는 진보좌파 경제학자들은 타인에게 이익이 되고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재귀적 이기심 셀프 인터레스트(self interest)를 알지 못합니다. 한겨레에 자주 칼럼을 기고하는 이강국 교수는 셀프 인터레스트를 단순한 이기심, 프라이빗 인터레스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들 진보좌파 사상가들은 이기심이라면 부정적인 의미의 사적 이기심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깊은 열망과 정부만이 그러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고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진보좌파 사상가들이 민간과 이기심을 부정적으로 보고 공공을 최우선으로 두고 공공에서 사회 문제의 해법을 찾게 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이기심에 대한 개념 이해의 차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진보좌파들의 모순은 공공을 움직이는 주체도 역시 사람이고 사람의 집단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위와 현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공무원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전념한다는 당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이들도 사람이며 이기심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진보좌파들은 상대에게도 이익이 되는 이타적인 재귀적 이기심 셀프 인터레스트(self interest)를 모르고 타인에게 해로운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의 이기심이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self interest는 모르고 이기심이라면 private interest가 전부인 그 공무원들이 반드시 공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어떻게 보장할까요?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경제의 장점이 사람들이 공익을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을 가장 잘 촉진하는 방식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을 압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셀프 인터레스트(self interest)와 프라이빗 인터레스트 (private interest) 의 차이를 알고 셀프 인터레스트 (self interest)가 주된 동기가 되도록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갑니다.

The one thing (Gary Keller, Jay Papasan 공저, 2013)이라는 책은 알코아社의 CEO 폴 오닐이 산업안전과 인간성존엄을 회사의 최고 목적으로 삼고 경영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폴 오닐이 알코아사의 신임 CEO에 선임되면서 산업안전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인간성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고 발표했을 때, 주주들은 "완전히 또라이 히피가 알코아의 최고경영자가 되었어...이 회사는 이제 희망이 완전히 없는 듯 해...."라면서 주식을 팔아치웠습니다.

그러나 알코아사는 폴 오닐 CEO 재임 15년간 사고율이 수십 분의 일로 줄어들었으며 순이익은 5배로 증가해 '위대한'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한국의 진보좌파 사상가들, 즉 도덕적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은 알코아의 폴 오닐의 일화를 본다면 한국의 안전불감증과 경영자의 무자비한 쥐어짜기를 지적하며 그들의 도덕성을 개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의 도덕성만을 걸고넘어져 봐야 넘어진 산업안전과 인간성존엄이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달려나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 다쳐서 쓰러진 상태로 널브러져 있을 것입니다.

도덕성을 이끌어낼 객관적, 경제적 유인이 없이는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과시하고 인간존엄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사디스틱 하게 바라보면서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정치적올바름(PC주의)'만 고양시킬 뿐입니다.

알코아사의 폴 오닐이 산업안전과 인간성존엄을 회사 경영의 최고 가치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서구사회가 물질적 기반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고 극한의 경쟁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기반이 갖춰져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도덕성과 인간존엄을 외쳐봐야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한국은 대기업이 너무 적고, 경쟁이 부족해서 알코아의 폴 오닐처럼 극한까지 경영을 할 유인이 없습니다. 현재 한국은 대기업의 고용 비중이 10% 수준인데 이것을 선진국 수준인 4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저런 극한의 생존경쟁을 위한 경영이 가능해집니다. 극한의 생존경쟁을 위해서는 안전과 인간성존엄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100점만점 짜리 제품을 만드는 A기업과 B기업이 있을 때 A기업은 허구한 날 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합니다. B기업은 산재가 없이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일합니다. 그렇다면 시장경쟁 원리에 소비자들은 B기업의 제품을 선택합니다. 물론 이러기 위해서는 평판 경제 시스템이 갖춰져서 A기업과 B기업의 정확한 정보가 시장에 공유되어야 합니다. 결국 A기업은 도태되고 국민경제에 더 바람직한 B기업이 선택됩니다.

이러한 원리를 한국의 진보좌파들은 모릅니다. 전통골목상인을 보호해야 하고 생계형 자영업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반대로만 달려갑니다. 민주노총과 공공좌파 기득권들이 낙하산 부대로 내려오고 채용비리로 친인척 불러서 대대손손 자리 나눠먹는 그 기업 공기업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경쟁이 부족해서입니다.

극한의 생존경쟁을 하는데 현장의 기술인력을 열악한 상태로 홀로 보내고, 넘쳐나는 고연봉 사무관리직들은 할 일 더럽게 없어서 책상 앞에서 탱자탱자 할 수 있을까요?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며 훨씬 더 안전성을 높이며 직원들의 복리를 키우고 생산력을 높여서 기존의 기업들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다른 수많은 경쟁자에게 도태되고 말지. 이런 매커니즘으로 구의역 김 군과 같은 안타까운 희생자들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좌파 사상가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도 이러한 셀프 인터레스트의 개념이 나옵니다. 자베르가 죽기 전에 쓴 '유서 : 업무의 개선을 위한 몇 가지 견해'를 읽어보면 자베르, 빅토르 위고가 셀프 인터레스트를 추구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012년 12월 18대 대선 직후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국내에 처음 상영되었을 때 민주진보좌파 깨어있는시민들은 자베르를 박근혜에 비유하고 장발장과 앙졸라와 혁명동지들을 문재인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장발장이 자베르를 이겼다면서 자베르가 멸망한 것처럼 박근혜가 멸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근혜의 탄핵은 필자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자베르를 박근혜에 비유한 것은 한국의 진보좌파들이 레미제라블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가 아닐까 합니다. 객관적, 한계적 경험주의자인 자베르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정신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휴머니즘에 기반해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철학입니다. 그리고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바로 휴머니즘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매시기 다양한 휴머니즘이 있었지만 그 모든 다양한 휴머니즘을 관통하는 본질적 요소가 바로 인간 세상의 참혹한 현실 직시입니다. 즉 동정과 연민이 휴머니즘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필자가 레미제라블을 읽어본 소감은 도덕적, 구성적 합리주의자인 앙졸라와 그의 혁명동지들보다 한계적 경험주의자인 쟈베르가 인간의 존엄과 민중의 복리 신장에 더 큰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생존의 조건에 지배받기 때문에 사람보다 돈을 앞세워야 사람이 귀해진다는 이치를 자베르는 알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베르가 유서를 남기고 떠나는 마지막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서술합니다. 레미제라블의 진정한 주인공은 장발장이 아니라 자베르인 것처럼 보입니다.

[유서 : 업무의 개선을 위한 몇 가지 견해]

첫째, 시경국장께서 일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심에서 감방으로 돌아오는 피의자들이, 그들의 몸을 수색하는 동안, 신발을 벗고 맨발로 포석 위에 서 있습니다. 감방에 돌아온 후 기침하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그것은 의료비 지출과 직결됩니다.

셋째, 요원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연속성을 가지고 미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안이 중대할 경우, 최소한 요원 둘은 서로를 시야에 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돌발 사정으로 인해 요원 하나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할 경우, 다른 요원이 그를 감시하거나 대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넷째, 마들로네뜨 감옥의 특별규정이 무슨 연유로 심지어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에도, 죄수들이 의자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마들로네뜨 감옥의 수감자 식당에는, 주방과 식당 사이에 가로 막대가 둘밖에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식당의 여종업원이 자기의 손을 수감자들이 만지도록 내버려 두기도 합니다.

여섯째, 다른 수감자들을 면회소로 부르는 일을 담당한 수감자들, 이른바 '호출꾼'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는 대가로 2쑤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절도 행각입니다.

일곱째, 직조 작업실에서는 실 한 가닥이 빠질 때마다 수감자의 임금에서 10쑤를 공제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천의 질이 나빠지지 않는 바, 업자가 수감자들의 처지를 악용하는 처사입니다.

여덟째, 포르스 감옥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쌩뜨 마리 레집씨엔느 면회소에 가기 위하여 '꼬마들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아홉째, 사법관들이 피고인들을 신문한 내용에 대하여 헌병들이 매일 경시청 안마당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성해야 할 헌병이 예심 법정에서 들은 사실을 떠들어대는 것은 매우 심각한 질서 문란 행위입니다.

열번째, 앙리 부인은 정직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수감자 식당을 매우 깨끗하게 관리합니다. 그러나 여인이 비밀 감방 입구의 창구를 담당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위대한 문명국의 꽁시에르주리 감옥에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일등 수사관 쟈베르.

샤뜰레 광장 경비대 초소에서.

1832년 6월 7일 새벽 1시경.

'중대재채처벌법'의 도입을 위해서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의 일화를 되돌아보고 드워킨의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과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알코어를 5배 성장시킨 폴 오닐의 경영 비법이 먹혀들어가는 조건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의역 김 군과 태안화력발전 김용균 씨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에 하루빨리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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