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택의 『지산외유일지』
현재 문재인 정부는 아세안 및 인도와 관계를 강화하는 해상 전략의 일환으로 신남방 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의 생존 및 번영을 위한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과거 어느 시점부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동남아 현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을까?
진주 출신의 학자 조완벽처럼 일본 상인의 도움에 의해서나 혹은 제주도 사람들처럼 해상 사고에 의해서 동남아 지역을 찾게 된 경우는 17세기부터 확인되는데, 이러한 사례들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보다 다양한 이유로 여행, 이주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1896년에 윤치호는 유럽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 남부의 항구 사이공에 들렀고, 1897년에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 공사에 임명된 민영환은 유럽으로 여행하던 도중 통킹만을 경유하였고, 1901년에 의병장 민용호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하여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등지의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본 다음 홍콩에서 베트남 북부로 향하여 운남성과 귀주성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어서 1910년대에 이르면 독립운동가들이 운남성의 군관 학교에 가기 위해 상해에 있던 한인 독립운동 진영의 주선에 의해 광주나 홍콩을 경유하여 베트남의 하이퐁에 도착한 후 운남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한인 상인들도 이미 1910년대부터 인삼 판매를 목적으로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후, 그곳에서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로 판로를 확대하고자 노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인들의 동남아 체험은 1910년 한일 ‘병합’과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중국으로 망명했던 일부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삶 속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충북 음성 출신으로 1910년대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정원택(鄭元澤, 1890-1971)의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에 의하면,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본 비밀경찰의 감시와 체포 위협에 시달리던 홍명희(洪命熹, 1888-1968)가 1914년 11월 말 김덕진(金德鎭, 1864-1947), 김진용(金晋鏞, 1889-1958), 정원택 등과 같은 동지들에게 '남양 군도'로 떠날 것을 제안하여, 이 네 명의 한인 청년들은 1918년까지 싱가포르를 주된 근거지로 하여 말레이 반도, 자바 섬, 태국 등지를 체험할 수 있었다.
여행의 주된 목적이 “신해혁명 전후 중국 혁명파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남양(南洋)의 화교 중에서 많이 연출(捐出)되었기 때문에 재원이 풍부한 남양에 독립운동의 자금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사”에 있었으므로,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한인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이미 검토한 바 있다.
그런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중국에선 어려운 일 뿐인데 남쪽 나라에선 노래와 시만 읊으네”라고 술회한 정원택의 언사에도 주목하여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이상한’ 동남아 체험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상해, 홍콩, 말레이시아의 사바(Sabah) 지역(Sandakan, Kota Kinabalu, Labuan) 등을 거쳐 싱가포르에 정착하여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와 태국의 방콕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던 정원택은 여행 초기 경험했던 배 멀미와 낯선 날씨에 점점 적응해 가면서 관찰과 현지 경험 등을 통해 이국적인 동남아 인상을 소개하였다.
동남아 정착 과정에서 화교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지원으로 의식주를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해 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네 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방문하는 곳곳에서 유람을 하거나 현지 중국인들의 풍습을 체험하면서, 중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식물원, 박물관, 영화관 등과 같은 ‘근대적’ 문명의 혜택을 풍부히 누릴 수 있었다. 아울러, 정원택은 말레이시아의 사바 지역과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 태국의 연안과 방콕 등지를 주유(周遊)할 수 있었기에, 싱가포르가 당시 “유럽과 아시아 내왕의 중심지요, 남양에서 제1의 대도시이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현지의 이국적인 경관은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산다칸 항구에서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실론 출신 세리(稅吏)와 같은 ‘토인(土人)’은 “검은 칠을 한 듯한 얼굴빛”으로 공포심을 자아내는 존재이기도 하였으며, 항구 저편의 숲 속에서 “붉은 다리에 몸이 노출되고, 하는 행동이 원숭이 비슷한” 토인은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부안의 어떤 촌락에 대해서는, “남녀가 모두 맨발에다 웃통은 알몸이고, 다만 아랫도리만 짧은 치마로 가렸을 뿐이고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다”라고 토인의 희한한 생활상도 기록으로 남겼다.
중국과 동남아에서의 독립운동 경험을 그저 “방랑”으로 표현한 홍명희가 “이 때까지 아무에게도 아니한 이야기, 비중비화(秘中秘話)”를 1930년에야 이르러서 어떤 대중잡지를 통해 고백하게 된 저간의 사정도 사창가의 “남양 미인(美人)”에게 방의 불의 켰다는 이유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이상한’ “대봉변(大逢變)”에 대해 토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Philippe Tâm 작가, 파리 제1대학교 역사학 박사
저작권자 ⓒ 평판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