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진보좌파의 위선을 비판해온 진보좌파 지식인

민주노총과 영남패권주의의 위선을 일관되게 비판

이승훈 승인 2024.04.20 15:16 의견 0
홍세화 선생 / 사진=위키피디아

홍세화 선생이 지난 18일 별세했다. 홍세화 선생은 한때 한겨레에 몸을 담기도 했고(2002년 한겨레 편집위원). 같은 시기 한겨레에서 일했던 후배로서, 그리고 동시대를 같이 살아온 시민으로서 홍세화 선생에 대한 기억 몇 가지를 추려본다.


1.
홍세화 선생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가 여느 사람들처럼 필자도 1995년에 출간된 홍세화 선생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알게 됐다.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를 유행시킨 책인데, 필자는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서평만 읽었을 뿐이다.

사실 이 똘레랑스라는 것을 영국의 존 로크가 처음으로 조명했고, 독일의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톨레란츠 철학으로 완성했다.

법대에 들어가면 법학개론과 법철학, 그리고 헌법 과목에서 지겹도록 배우는 게 바로 톨레란츠 철학이다.

그래서 책이 새로운 것도 없어서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홍세화 선생의 책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관용, 낯선 이에 대한 존중을 통해 인종차별과 파시즘을 시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오히려 홍세화 선생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불뽕(프랑스 사대)'이 심하다는 시각인데, 개인적으로 '불뽕'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적잖이 동감한다.

사실 프랑스라는 나라가 그렇게 똘레랑스라는 것, 관용이라는 것을 국가적 상징 자산으로 주장할 만한 나라가 아니다. 차라리 독일이 더 자격 있다.

인도차이나에서 현지인들을 순전히 재미로 야생동물들의 먹이로 던지던 게 프랑스인들이다. 야만적이기로는 벨기에도 프랑스와 막상막하이지만 그래도 프랑스는 무려 20세기 후반 최근까지,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식민지 속국민인 알제리 국민들을 상대로 조직적으로 고문, 살인, 탄압한 세계 유일의 나라였다. 그만큼 프랑스라는 나라가 개념이 없는 나라다.

뿐만 아니라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기사'라는 책이 나오기 한 해 전에는 르완다 대학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이래 현대사 최악의 인종차별 대학살이다. 이 인종차별 대학살에 프랑스가 적극 가담했다.

르완다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프랑스와 르완다의 관계는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사건 이래 긴장 상태가 계속돼 왔다. 르완다 대학살에서 프랑스가 한 짓은 용서받기 힘들다. 후투족의 투치족을 상대로하는 대학살 과정에서 프랑스는 후투족의 무장을 지원하고 보호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르완다 인종차별 대학살을 직접 실행해서 살인, 강간하는 행위자를 처벌함과 동시에 직접 살인 강간하지는 않았지만 말로써, 이를 방조하는 내용으로 증오표현을 한 행위자, 언론들도 같은 증오학살 혐의로 처벌했다.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대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도왔다. 그런데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진짜 나쁜 나라다. 그나마 최근에 마크롱 대통령이 유감의 표시를 나타냈기는 냈는데, 사과를 한 것이 아니라 유감의 표시를 했다.

그리고 마크롱 대통령의 처신이 매우 불량한 것이 프랑스가 적극 가담해서 인종학살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대량 학살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럴 의지가 없었다"며 사실관계를 조작하고 책임회피를 했다는 점이다.

대학살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르완다에는 아직도 프랑스 대사관이 없다. 그만큼 르완다 사람들은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한국의 민주진보좌파들 만큼이나 진짜 위선적이고 모순, 야만 그 자체인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 같은 위선적이고 야만적인 나라에게 똘레랑스라는 고귀한 상징 자산을 부여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본다. 실정이 이러하니 프랑스를 똘레랑스의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는 홍세화 선생의 책이 그다지 달가울 리가 없다.

프랑스는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것처럼 톨레란스 내지는 톨레란츠를 훔쳐갔다고나 할까? 암튼, 똘레랑스 말고 톨레란츠.


2.
시간이 흐르고 2002년 1월 홍세화 선생은 영구 귀국했고 그해 2월 한겨레에 입사해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필자는 2003년 5월에 한겨레(당시는 인터넷한겨레 토론팀장, 취재팀 선임기자)에 입사했다. 당시는 인터넷한겨레는 한겨레신문의 자회사였다. 어쨌든 같은 언론사 선후배 관계가 됐다.

솔직히 홍세화 선생에 대한 시각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별생각이 없었다. 필자가 홍세화 선생에 대한 시각을 바꿔 긍정적으로 보게 된 계기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과의 격론이었다.

2004년, 홍세화 선생은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과의 대담에서 ‘대공장 이기주의론’을 거론하며 귀족노조 중심의 민주노총을 비판했다.

홍세화 선생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고 보수정당에 투표를 하는 이유는 민주노총이 학습보다는 투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대공장 귀족노조 중심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는 행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홍세화 선생은 이렇게 가다가는 한국의 노조는 멕시코 노조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고 국민의 외면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병호와의 격론 이후 20년, 홍세화 선생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아웃사이더 17호 (2004.1)

홍세화 선생과 단병호 위원장의 대담은 아웃사이더 17호(2004.1.)에 수록되어 있다. 관심 있고 기회가 되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한국 노동운동과 진보좌파의 미래에 대한 홍세화 선생의 선견지명이 담겼다.

홍세화 선생의 그 책이 나왔을 때 필자는 민주노총과 한국 노동운동, 진보좌파 진영에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긴가민가 했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필자는 2005년 민주노총 기관지인 '노동과세계' 편집장으로 민주노총에 들어가게 됐다.

채근식 민주노총 비정규국장의 권유로 들어가게 됐는데, 당시 채근식 국장은 필자를 민주노동당의 청년정치인으로 육성해서 국회에 진출시킨다는 복안을 갖고 필자에게 민주노총에 들어올 것을 오랫동안 계속 권유해왔다. 필자는 정치에는 관심 없었고, 그전에 필자가 재직하던 국민일보에서 못 볼 꼴을 봤기 때문에 민주노총에 들어갔다.

필자는 2004년 한겨레를 퇴사하고 국민일보에 인터넷뉴스부 기자로, 정규직으로 입사했었다. 이듬해에는 국민일보에는 쿠키뉴스가 론칭되어서 쿠키뉴스의 인터넷 부분을 기획했다. 이때 후배 쿠키뉴스 기자들이 다수 입사했는데 모두 비정규직이었다.

같이 일하는 선배가 된 입장에서 후배들이 비정규직으로 차별받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조용기 일가와 투쟁하면서 언론계와 노동계에서 민주노조로 평판이 높은 국민일보 노조 선배기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선배 기자들, 국민일보 언론노조는 비정규직 후배기자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고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노조의 선배기자들의 위선과 무관심에 실망한 나머지 국민일보의 안정된 직장을 퇴사하고, 연봉 감소를 감수하고 직접 비정규 운동을 하기 위해 2005년에 민주노총에 들어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순진했다.

민주노총에 들어가서 기관지도 만들고, 비정규직운동을 직접 하면서 모든 것을 본 결과, 홍세화 선생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민주노총은 단순한 이익단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홍세화 선생이 필자처럼 위선을 못 참는다. 비록 경제정책, 경제 이슈를 보는 관점에서, 즉 어떻게 해야만 인권과 평등이 확산되는지에 대한 정책 수단에서 시카고 쪽 신자유주의자인 필자와는 정반대이지만 (당연히도, 필자는 경제발전과 평등 이슈에 대한 해법에서 홍세화 선생과 강준만 선생이 틀렸다고 본다) 지금까지 필자가 진보좌파에서 유이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지식인이 홍세화 선생과 강준만 선생 두 분이다.


3.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장발장 은행의 200번째 전액상환자 보도자료를 통해서 홍세화 선생이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당시 보도자료와 200번째 전액상환자 사연을 간추려 보자면

"장발장 은행은 2015년 2월 25일 문을 연 이후로 지금까지 81차에 걸쳐 980명의 시민에게 총 1,711,607,000원을 대출했다. 그 중 대출금을 전액 상환한 사람은 7월 20일자로 총 200명이 됐다.

장발장 은행의 200번째 전액 상환자는 부산에 사는 A모씨다. A모씨는 2015년 11월 10일 장발장은행에서 300만원을 빌렸고, 빌린 돈을 2개월에 걸쳐 150만원씩 나눠갚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상환이 늦어지다 5년이 지나 7월 20일 마침내 전액을 상환했다."

보도자료를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두 가지.

첫째. 참으로 200번째 전액상환자도 홍세화 선생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구나,

상환은 5년이나 늦었지만 마치 미리엘 신부로부터 은촛대를 받은 장발장이 나중에 많은 자선으로 은혜를 갚은 것처럼 결국 약속을 지켰구나, 5년 동안 은행의 도움을 잊지 않고 마침내 상환을 하기까지 그의 심정과 인생 역정은 어땠을까? 장발장 못지않게 드라마틱 할 것 같구나.

둘째, 국가는 왜 이들 장발장들을 방치하는가?

장발장 은행은 벌금형을 선고받은 뒤 형편이 어려워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을 돕는 은행이다. 장발장 은행은 이들에게 신용조회를 하지 않고 무이자, 무담보로 최대 300만원까지 대출해 준다. 채권 추심도 없다.

2024년 4월 14일까지 장발장 은행에는 누계 2,371,035,369원의 성금이 모였다.

현행 형법상 벌금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내에 현금으로 벌금을 한 번에 내지 못하면 노역장에 유치된다. 장발장 은행은 이들에게 대출을 해주어 노동의 기회를 주고 자유를 준다.

이걸 국가가 할 수는 없는가?


4.
18일 홍세화 선생이 별세하셨다. 어저께 홍세화 선생을 한 컷으로 조명하는 한겨레 그림판의 만평을 인터넷,SNS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다.

4월 19일 한겨레 그림판 권범철 기자

한겨레 그림판을 보면서, 한겨레가 홍세화 선생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 사회를 매우 왜곡해서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세화 선생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한 말을 보여주면서 주변의 진보좌파들의 위선과 잘못된 말을 대조시킨 만평이었다.

그런데 "진보가 가난해야 한다는 것도 편견" 이거 맞는 말이다. 이걸 왜 홍세화 선생의 말과 대조시키나?

"아파트 한 채 애한테 주려는데 절세 방법 좀" 이것도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나? 절세하는 것 당연한 시민의 권리다. 납세의 의무와 충돌되지 않는다.

"코인, 주식도 해봐야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 이것도 너무나 맞는 말이다. 코인이나 주식도 해봐야 우리가 쓰고 있는 자원들이 어떻게 순환하고 분배되는지를 알 수 있고 음수사원(飮水思源)을 할 수 있다.

진보좌파라고 해서 돈 욕심을 내면 위선적인 인간으로 취급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됐다.

시민들이 진보좌파를 비난하는 이유는 진보좌파들이 '탈법과 불법으로' 돈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탈법과 불법으로 돈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면 안 된다.

엊그제에는 일본의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레귤러 커피 요금을 내고 라지 커피를 내려받아 사기범죄행위로 인정돼 파면을 당한 뉴스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보다 훨씬 심한 부정행위를 해도 심지어 파렴치 범죄를 저질러도 국회의원이 되는 데에도 지장이 없다. 진보좌파들이 특히 심하다. 제발 좀 위선적으로 살지 말라.

시민들이 진보좌파들에게 "위선적으로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진보좌파들에게 돈 욕심을 내지 말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면 한겨레, 권범철 화백을 비롯해 진보좌파들의 심각한 착각이다.

오히려 시민들은 민주진보좌파들에게 제발 좀 돈 욕심을 가지고 살라고 요구한다. 다만...

제발 좀 정당하게 경쟁해서 돈을 벌고 제발 좀 정당하게 경쟁해서 입학을 하고 제발 좀 정당하게 경쟁해서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이다.

만평에서는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김교수, 논문에 우리 애 좀 끼워 주라. 내년에 고3이라" 이 부분이다. 한겨레신문이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와 사이가 좋지 않나? 아무튼 그 부분만은 민주진보좌파들을 비판하는 말로 공감된다.

홍세화 선생은 귀국해서는 영남패권주의와 진보좌파들의 위선을 꾸준히 비판해왔다. 한국 진보좌파에 홍세화 선생 (그리고 강준만 선생)만큼 모순 없이 비판적인 지식인이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없다.

홍세화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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